중력이 누굴 사랑한다면, 끌어내리는 일뿐이어서 08/04

첫여름 그늘에 앉아 생각한 건 네가 아니었다 오지 않는 한 편의 시 같은 건 더욱 아니었다 다만 소낙비가 내렸고 빗방울 사이로 아슬아슬 허공에 붓질하듯 검은 나비 한 마리 욜랑대고 있었다

 

비가 누굴 사랑한다면, 적시는 일밖에 할 수 없어서

중력이 누굴 사랑한다면, 끌어내리는 일뿐이어서

 

나는 한두 줄 문장을 떠올리다가 깊어가는 그늘에서 생각한 건 네가 아니었으므로 낙오된 한 편의 시 같은 건 더더욱 아니었으므로, 이건 내 오랜 병명이구나─ 저 나비의 궤적이 누구의 이름일 리 없건만 나비의 목소리는 나 비(非)의 시간 너머에 있을 것이건만─ 이것은 남루한 변명이구나, 그저 전략이 아닌 전력으로 빗속을 헤치고 있는 부르기 미안한 이름을 주린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비가 멎자 자연 바위에서 젖은 날개를 부채질하듯 흔드는 어떤 말씀을─ 시간이 지나면 모든 시는 만가가 되듯이 모든 순간이 한 이름으로 수렴하는

 

그 이름을 생각하면 외눈과 지옥과 나비가 된다는

아름답고 축축한 오독과 하릴없는 병명과 변명을

 

날 부르지 않는 이름의 무늬를 보며 생각했다

어떤 삶은 어떤 이름의 얼룩이라고 생각했다

 

 

이현호, 외눈이지옥나비로 생각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