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어서 08/04

어릴 때부터 나는 늘 끝을 궁금해했지요

동화책을 읽어도 만화영화를 보아도

그래서 마지막에 다들 어떻게 되는지

그는 어떻게 그녀는 어떻게

그녀가 기르던 작은 고양이는 어떻게

그 고양이가 가지고 놀던 동그란 공은 어떻게 될까

숨을 참고 허겁지겁 따라갔지요

 

이미 죽은 사람들의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으면서도

나는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보다

어떻게 죽었는지를 알고 싶어 했지요

마지막 눈을 감던 순간에 그는 어디에 있었는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떤 표정으로 어떤 손짓을 했는지

누가 그 곁을 지켰는지

혹은 그저 홀로 마지막을 맞았는지

그래서 쓸쓸했는지 그래서 불안했는지 그래서

안도의 긴 숨을 내쉬었는지

그런 것들이 알고 싶었지요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할 때도

나는 항상 끝을 먼저 생각했지요

먼 훗날 지금의 기억들이 내게 독이 될 것인지 약이 될 것인지

이별의 징조는 언제 어떤 식으로 찾아와

무엇으로 마침표를 찍을 것인지

그때 나는 절망할 것인지 후회할 것인지

혹은 고마워할 것인지

그래서 눈물이 날까 웃음이 날까 몰래 상상해 보며

다가갈까 도망갈까 이쯤에서 멈출까 하는 생각들을

멈추지 못했지요

 

그러나 당신도 알고 있듯

세상도 사람도 정말로 우리가 궁금해하는 것들은 가르쳐주지 않지요

어느 순간 문은 내 눈앞에서 닫히고

나는 홀로 남겨진 채

엔딩 크레디트를 바라보며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바라보며

누군가의 사망연도를 오래오래 바라보며

짐작할 수 없는 것들을 짐작하려 하지만

당신은 말이 없고

끝나버린 사랑은 아무것도 대답해주지 않았죠

그러니까 

축제가 끝난 텅 빈 광장이라거나

모두가 돌아가버린 텅 빈 공연장 같은 곳에

나는 휴지조각처럼 버려져

누구도 나를 찾지 않을 거라며

아무리 기다려도 아침은 오지 않을 거라며

어린아이처럼 절망을 우긴다 해도

 

내가 너무 비관적인 거라고 비난하지는 마세요

내가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거라고

당신을 믿지 못하는 거라고

나무라지는 마세요

희망을 노래하라고 꿈을 의심하지 말라고

다그치지 마세요

세상이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다면

나는 절망하지도 않고 비관하지도 않을 거니까요

마지막을 궁금해하지도 않을 거니까요

당신은 안 그런가요

노래라거나 꽃이라거나 마음이라거나

그토록 연약한 것들이 아프고 불안하지 않은가요

그래요, 사랑은 나의 치명적인 약점이어서

사랑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어서

 

꿈에라도 잃을까 꿈에라도 얻을까

안절부절못하다가

언젠가 그렇게 죽을 거니까

 

그러므로

언젠가 만약 당신이 나의 비석에 새겨진 네 개의 숫자를 보게 된다면

그 안에 담긴 것들을 유심히 읽어주길 원해요

내가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것들을

어쩌면 사랑을 위해

아마도 당신을 위해

포기했던 모든 것들을

 


황경신, 어느 비관주의자의 변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