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선배도 바쁘고 참석 인원도 적어서 소설 읽기 모임이 흐지부지 끝난 지 반년 가까이 되어가던 겨울. 그렇지만 선배가 문과대 건물 안의 연구실에 주로 있었기 때문에 선배가 보고 싶어지면 나는 노문과 연구실이 있던 4층을 서성이곤 했다. 첫눈이 내리던 그날도 나는 4층의 복도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열번은 넘게 오가고 있었다. 눈이 귀한 고장 출신이라 서울에 와 가장 좋았던 것이 눈을 자주 볼 수 있는 거라 했던 J선배의 말을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J선배는 좀처럼 마주쳐지지 않고, 눈이 그칠 것 같아 맘은 초조하고, 뭔가 핑계를 만들어 문자메시지나 보내볼까, 시무룩한 마음으로 궁리를 하고 있는데 어디를 갔다 오는지 어깨 위에 눈이 쌓인 J선배가 4층으로 올라오다가 나를 발견하고 고요히 웃었다.
우리는 자판기에서 뽑은 달달한 커피를 들고 문과대 현관에 서서, 언덕 아래의 본관 앞 벚나무 위로 소리 없이 떨어지는 눈송이를 내려다보았다. 선배와 나란히 서서 첫눈을 보기 위해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텅 빈 복도를 서성였는지 선배는 영원히 알 수 없을 테지. 그러거나 말거나 떨어지는 눈송이는 아름다웠다. 손을 뻗으면 눈송이가 손바닥 위로 내려앉았다가 소리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아름다워요.
선배도 나를 따라 손을 허공에 뻗었다. 선배의 거뭇한 손 위로 하얗고 여린 눈송이가 조용히, 그리고 영원처럼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꼭 벚꽃잎 같네.”
선배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선배는 고향에 쌍계사라는 절이 있는데 그 근처 십리 길을 따라 죄다 벚나무가 심겨 있다고 했다.
“그 벚꽃길을 같이 걸으면 백년해로를 한다더라.”
선배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선배, 선배는 왜 그런 말을 내게 하는 거예요, 나는 발뒤꿈치를 들고 엄마에게 쓰다듬어달라고 머리를 들이미는 아이처럼 선배에게 자꾸 묻고만 싶었다. 먹색에 가까운 어둠속에서 겨우 형체만 가늠할 수 있던, 본관 앞 벚나무의 새까만 가지 위로 함박눈이 쌓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선배는 내게 할 말이 있는 듯 계속 망설였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선배의 발끝만 보았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지? 선배가 결국 맥없이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선배 손에서 나던 은은한 담배 냄새. 내가 교환학생으로 선발되어 러시아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지 않았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불도 켜지 않고 방 한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J선배와 통화를 하던 밤들이 떠오르면 나는 가끔 그게 궁금했다. 선배도 알았을 텐데. 그날 선배 옆에 서서, 흔적도 없이 녹아 사라질 4월의 눈을 맞으며, 십리를 선배와 하염없이 걷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내가 속으로 기도했다는 것을.
“참, 너네 J선배 소식 들었어?”
작업이 다시 무료해졌는지 담이 입을 열었다.
“선배가 혹시 너도 찾아왔어?”
“아, 그럼 너도?”
영과 담이 주고받는 질문들 속에 등장하는 이름에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영과 담은 그런 나와 상관없이 지루한 표정으로 아크릴판에 알코올을 뿌렸다.
창밖으로 무엇인가 하얀 것이 떨어져내렸다. 눈인가? 눈일 리는 없는데. 그러면 저것은 꽃잎인가? 저렇게 자꾸만자꾸만 떨어져내리는 것은?
우리는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한시간가량 늦게야 일을 끝마쳤다. 작업을 확인하러 온 것은 이번에도 김 팀장이 아니라 후임이었다. 우리는 직원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왔다. 이미 폐점한 백화점 안은 어두웠다. 몇시간 전까지만 해도 빛나던 상품들이 하얀 천에 덮여 있었다. 영과 담은 지하철을 타러 간다고 했다. 나는 불 꺼진 백화점 정문 앞에서 친구들과 헤어졌다. 거리를 혼자 걷고 싶었다. 상점마다 온갖 빛이 가득한 거리는 어딘가를 향해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환한 점포를 등지고 선 호객꾼들이 관광객을 향해 외국어로 뭐라고뭐라고 소리를 질렀다. J선배와 닮아 보이는 정장 차림의 사내가 취기를 이기지 못하고 보도블록 위에 주저앉아 있었다. 나는 서류가방을 끌어안은 채 전신주에 기대어 조는 사내를 멈춰 서서 잠시 바라보았다. 머리숱이 적은 사내의 얼굴은 앳되어 보였다. 초조한 눈빛으로 연신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던 J선배. 담의 말에 따르면 선배가 입도 대지 않아 커피는 테이블 위에서 그대로 식었다고 했던가.
밤거리를 오래 걷다가 집에 돌아오니 방음이 잘 되지 않는 외벽을 타고 누군가의 집에서 늦은 밤 세탁기 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분 탓인지 온몸에서 알코올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나는 겉옷을 벗어 빨래바구니 속에 던져넣었다. 책상 위에 올려둔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그것은 조교장이 보내온 공지 문자메시지겠지만 약속을 잊지 않았는지 확인하는 J선배의 메시지일 수도 있었다. 나는 메시지를 확인하는 대신 서랍장을 열어 갈아입을 속옷을 챙겼다. 서랍에서는 마른 버섯 냄새가 났다. 이상한 냄새잖아,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라 나는 책장 두번째 칸에서 『첫사랑』을 찾아 꺼냈다. 책을 펼치니 책갈피에는 한때 가볍고 향긋했던 하얀 꽃잎이 바스러질 듯 마른 채 끼워져 있었다. 그 뒤로 한 페이지를 넘기자 오래전 푸른색 펜으로 내가 밑줄 그은 문장이 눈에 띄었다. 무심한 사람의 입으로부터 들었노라, 죽었다는 소식을. 그리고 나도 또한 무심한 사람의 얼굴과 같은 표정으로 이를 들었노라.* 그 문장을 읽는데 알 수 없는 어떤 이유에서인가 눈물이 났다. 아르바이트비는 월말에 입금될 예정이라고 했다.
백수린, 3 - 첫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