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 죽여줘" 11/15

몇 년 전, 제기동 거리엔 건조한 먼지들만 횡횡했고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아니었다. 우리는 언제나 잠들어 있거나 취해 있거나 아니면 시궁창에 빠진 해진 신발짝처럼 더러운 물결을 따라 하염없이 흘러가고 있었고......제대하여 복학한 늙은 학생들은 아무 여자하고나 장가가버리고 사학년 계집아이들은 아무 남자하고나 약혼해버리고 착한 아이들은 알맞은 향기를 내뿜으며 시들어갔다.
그해 늦가을과 초겨울 사이, 우리의 노쇠한 혈관을 타고 그리움의 피는 흘렀다. 그리움의 어머니는 마른 강줄기, 술과 불이 우리를 불렀다. 향유 고래 울음 소리 같은 밤 기적이 울려퍼지고 개처럼 우리는 제기동 빈 거리를 헤맸다. 눈알을 한없이 굴리면서 꿈속에서도 행진해나갔다. 때로 골목마다에서 진짜 개들이 기총소사하듯 짖어대곤 했다. 그러나 197X년, 우리들 꿈의 오합지졸들이 제 아무리 집중사격을 가해도 현실은 요지부동이었다. 우리의 총알은 언제나 절망만으로 만들어진 것이었으므로......

 

어느덧 방학이 오고 잠이 오고 깊은 눈이 왔을 때 제기동 거리는 "미안해, 사랑해"라는 말로 진흙탕을 이루었고 우리는 잠 속에서도 "사랑해, 죽여줘"라고 잠꼬대를 했고 그때마다 마른 번개 사이로 그리움의 어머니는 야윈 팔을 치켜들고 나직히 말씀하셨다. "세상의 아들아 내 손이 비었구나, 너희에게 줄 게 아무것도 없구나." 그리고 우리는 정말로 개처럼 납작하게 엎드려 고요히 침을 흘리며 죽어갔다.

 

최승자, 197X년의 우리들의 사랑 -아무도 그 시간의 火傷을 지우지 못했다